삶의 지도 Exten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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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삶의 지도라는 것은 제가 붙인 이름이며,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사건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는가에 대해 작성한 내용입니다.
– 성윤님 의 글또 모집 글 중
글또 9기, 처음 글또를 지원했을 때 작성했던 삶의 지도는 좀 아쉬웠다. 시간의 압박이 거세어 분량이 적었고, 내 삶을 돌아보는 계기는 되어주었지만, 그뿐이었다.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사실만 나열된 느낌이라, 언젠간 꼭 각 잡고 제대로 다시 적어봐야겠다고 다짐했지만, 벌써 10기를 넘어버렸다. 최근 채용 시즌을 겪으며, 졸업 사정과 부스트 캠프까지 겹치면서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데, 스스로를 환기하고자 일부러 시간을 좀 내어 적어보려고 한다. 운 좋게도 컬쳐핏 면접을 하나 보게 되었는데, 이를 앞두고 생각이 많아져서 글로써 한 번 정리하고 가고 싶은 마음도 있다.
학창 시절 이야기
프로그래밍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하게 된 초등학생 때
나에겐 나이 차이가 11살이나 나는 누나가 한 명 있다. 내가 늦둥이기도 하고,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셔서 어릴 때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컴퓨터 하는 시간이 초등학생 치곤 길었던 것 같다. 눈 건강을 신경 써야 했는데 카트라이더라는 게임을 특히 좋아했다. 놀토만 되면 엄마 회사에 따라가서, 옆자리에 카트라이더를 깔아서 했던 기억이 있다. 예전에는 코카콜라 콜라보도 있고 초코 송이 콜라보도 있었는데, 그거 때문에 박스로 코카콜라를 사서 쿠폰 넣어서 카트 사고 풍선 사고 그랬었다. 점점 게임 시간이 길어지니까 부모님의 제지가 있었는데, 컴퓨터 == 게임기
였던 난 게임을 못 하게 되니 컴퓨터로 할 수 있는 다른 할 거리를 찾게 되었다. 그때쯤 누나 대학 과제로 스크래치 가 나온 걸 보게 되었다. (지금은 어린이를 위한 블록 코딩 플랫폼으로 되어 있는데, 그 당시는 완전 최신 문물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이게 프로그래밍이란 건 몰랐고, 카트라이더 못 할 때 재밌게 가지고 놀 수 있는 여우 인형 같은 것이었다. 이걸로 게임 비스무리 한 것도 만들어보고, 아래 움짤처럼 그냥 막 돌려도 보고 그랬다.
이거 아시는 분…? 예전에 진짜 재밌게 갖고 놀았었는데, 지금 보니까 뭔가 기능이 되게 많아졌다.
꿈을 한 번 접었던 중학생 때
우리 지역은 중학교 배정이 추첨제였는데, 내 운이 정말 더럽게도 좋아서 250명 중 11명 떨어진 곳에 딱 걸렸다. 그래서 집 200m 앞에 있는 학교를 두고, 버스를 30분씩 타고 다녀야 했다. 평판이 그리 좋은 학교도 아니었다. 그 당시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한국에 롤이 상륙했던 시기였는데, 나에겐 진짜 재밌는 시기였다. 아직까지도 롤을 즐기고 있는데, 그때는 진짜 정말 많이 했다. 한 시즌에 1천 판씩 돌리고, 버스 카드 충전할 돈을 피시방에 넣고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 다니곤 했다. 더 싼 피시방을 가려고 먼 지역을 이동하기도 했었다. (버스비 생각하면 손해였다. 완전 바보인 듯) 스마트폰도 또래보다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손에 쥐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갬성이 중요했던 난 아이폰이 갖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경제권이 없기 때문에 부모님이 사주신 갤럭시 S2 HD LTE를 썼었다. 왜 이렇게 자세히 기억하냐면, 이 기기를 거의 고문에 가깝게 굴렸기 때문이다. 약간 홍대병 같은 게 있어서 시도 때도 없이 ROM을 갈아끼고, 튜닝된 커널을 올리고, 그러다 벽돌이 되기도 하고, 서비스 센터에 몇 번 갔었다. 그 당시엔 커널이 뭔지 ROM이 뭔지 하나도 몰랐고 그냥 깔끔한 안드로이드 순정 UI에 반해서 무모한 짓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진짜 불안정한 ROM도 막 갖다 올려서 배터리가 30분도 안갔던 기억도 있다. 담임 선생님께서 카이스트 온라인 영재교육원 같은 걸 추천해 주셔서, 파이썬 교육도 들었었다. turtle
라이브러리로 거북이 가지고 노는 걸 많이 했었는데, 스크래치가 더 재밌었다. 영어를 아주 싫어했었는데, 블록으로 코딩하는 스크래치와는 달리 영어를 직접 타이핑 해야 했으니 이 당시에는 정신 팔릴 정도로 몰입하진 못했다. 무엇보다 롤이 너무 재밌었다.
하여튼 난 IT 관련된 게 너무나도 재밌어서, 진로 고민이 많아질 때쯤에 특성화고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런데 거의 모든 선생님이 날 말렸다. ‘아니 자율고 갈 수 있을 정도로 성적도 괜찮은 애가 왜 그런 데를 가니’라는 말을 진짜 상담했던 선생님마다 다 들었다. 그때 특성화고 인식은 딱 그 정도였던 것 같다. 용기를 내어 부모님께도 말씀드렸었는데, 전혀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라는 말과는 다르게, 돈과 진로 걱정을 하시는 부모님을 외면하고 나만을 위한 선택을 할 자신이 없었다. (자세히 밝힐 여력도 없고 내막도 잘 모르지만, 당시 부모님 두 분 다 임금 관련 소송에 휘말려 집 안 사정이 아주 어려웠다) 그래서 꿈을 포기하고 집과 가까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고등학생 때 부터 첫 대학에 진학할 때 까지
평범한 고1, 미술 선생님이 굉장히 특이했다. 왜 그러셨는지 잘 모르겠지만 과제들이 굉장히 특이했다.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아주 치를 떨 정도로 악명 높은 과제가 많았지만, 내 기억에 남는 과제가 하나 있다. 본인의 진로 관련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과제가 있었다. 뭘 넣을지 고민하다가 간단한 2D 플랫포머 게임을 만들어 갔다. 근데 예상외로 호응이 너무 좋았다. IWBTG와 거의 동일한 형태였는데, 친구들이 다음 스테이지는 언제 만들어오냐고 재촉할 정도로 재밌게 플레이해 줬고, 이때의 경험이 내겐 너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하늘이 두 쪽 나도 컴공 진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대입 원서를 컴퓨터공학과로 도배했었다. 성적 맞춰서 과를 낮추는 전략 따위는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수능 날 역대급으로 망쳐버려서, 진짜 생각지도 못한 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전공은 컴퓨터공학이었다.
대학교 진학을 하고 나니 처음 해보는 일 투성이었다. 적응이 꽤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고자 노력했다. 파이썬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게 되었고, 과제가 너무 재밌었고, 빠르게 해치우고 이것저것 해보기도 했다. 교양과목은 너무 재미가 없었다. 첫 학기 시간표가 고정이어서, 듣기 싫은 과목인데 억지로 듣다 보니 뭘 배우는지도 모르겠고 앉아서 시간만 때우게 되었다. 통계 과목도 있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너무 쉬운 걸 가르쳤다. 고등학교 확률과 통계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 옆 친구가 팩토리얼도 모르는 걸 보고 너무 충격받아서 반수를 결심하게 되었다. 막상 반수 준비를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수능을 다시 준비할 자신은 없었다. 다른 과목이 너무 재미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수리 논술 올인이라는 완전히 미친 전략을 준비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제정신은 아닌 듯싶다. 수학이라도 재미를 느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예전 학교는 수강 신청할 때마다 지도 교수 상담이 필요했는데, 2학기 수강 신청을 하러 지도 교수 상담을 했을 때, 난 휴학 서류를 냈다. 다행히 내 지도 교수님은 파이썬을 가르치던 분이어서 나를 좋게 봐주셨고, 휴학 사유에 당당히 반수를 적어 냈지만, 오히려 응원해 주셨다. 뒤가 없는 전략이지만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한 우물만 파니까 준비가 수월했고, 컴공이 아니라 IT 관련 학과로 원서 풀을 늘리니 지금의 학교를 올 수 있었다.
제 발로 입대하기 까지의 이야기
지금의 학교는 1학년 때 C언어를 배웠는데, 처음 써보는 C언어였지만 파이썬에 대해 배웠었기에 이해가 어렵진 않았다. 그렇다고 C가 쉬운 건 아니었지만, 재밌게 들을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1학년을 두 번이나 했지만, 낭만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부모님 손 벌리기 싫어서 지금 학교 와서는 알바-집-학교 루트만 반복하였고, 장학금도 타고 싶어서 공부도 열심히 했다. 보통은 1학년 마치고 군입대를 하는데, 난 군대 가기가 너무 싫었다. (뭐 누군 가고 싶겠냐만은) 마냥 안 간다고 떼쓰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니까 적당한 사유가 필요했는데, 그러다 찾은 게 42 Seoul이었다. 이 정도 대외 활동이면 입대를 미루고 도전해 볼 법하며, 지원금도 주니까 알바 없이 공부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당시에는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선착순 지원을 받았었고, 수업 시간에 폰으로 광클해서 운 좋게 선착순을 뚫었다. 원래는 일정상 2학년 통으로 휴학하고 42에 도전해야 했는데, 팬데믹으로 계속 밀리다 보니 2학년을 진행하면서, 방학 때 42 피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코로나 때문에 반쪽짜리 피신이었지만, 정말 열심히 참여했다. 좋은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고, 처음으로 몰입하고 밤새며 프로그래밍 학습을 해보기도 했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 모여서 이틀 만에 과제를 하나 해치우는 경험도 할 수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도 즐길 수 있었으니, 직업으로 삼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42 관련해선 회고를 따로 쓰려고 했는데, 계속 미루게 된다….) 운 좋게 본과정까지 오게 되었지만, 21학점과 42 본과정을 같이 하다 보니 너무 힘들었다. 병역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스트레스 만땅이었고, 진로에 대한 고민에 번아웃이 와서, 이듬해에 제 발로 입대를 하게 되었다.
난 국직부대에서 복무했는데 (내 친구들은 현역으로 안쳐줄 정도로 꿀이었다) 그때 만났던 맞선임도 나와 비슷하게 도피성 입대를 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 사람은 대학원을 다니던 상태에서 건강상 이유로 탈주를 한 것이다. 이런저런 조언도 많이 들을 수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은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고 제대해 버렸다. 그래서 내 위로 아무도 없는 말도 안 되는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물론 분대장을 달았어야만 했고 그만큼의 책임은 있었다. 일반적인 부대랑 달라서 간부만큼의 행정을 봤던 것 같다) 이렇게 지내는 것도 익숙해질 때쯤, 슬슬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연등 시간에 아주 열심히 공부했던 맞후임을 보고 나도 ‘이것이 코딩테스트다’ 책을 읽으면서 자료구조와 알고리즘 기초를 닦기 시작했다. 이 열정은 100일도 채 안 갔지만, 그래도 전역할 때 다시 공부하기 위한 베이스로 충분했다.
전역한 후, 지금까지의 내가 되기 까지
42 Seoul 공통 과정
복학 후에는 다시 42 Seoul에 복학하여 공통 과정 과제를 밀기 시작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한 줌의 열정, 빨리 취업해서 독립하고 싶은 욕망 등 갖가지 감정들을 버무려 열심히 살려고 했던 것 같다. 정말 오랜만에 만져보는 아이맥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적응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알던 사람들이 한 명도 없어서 살짝 외롭기도 했다. 과제 3개를 병렬로 진행했던 것도, 미니 셸 열심히 만들고 cat | cat | cat
동작을 안 해서 리트라이 했다가 ""|""
에 바로 터졌던 것도, 밤새우면서 학교 과제와 42과제를 밀면서 시험공부도 했던 것도 기억이 생생하다. 학점이 꽤 여유로운 편이어서 일부러 적게 들으면서 병행했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 무렵 전공이었던 데이터에 대해 흥미를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원리는 대체로 재밌었지만, 코드 치는 게 얼마 없었다. 구현체의 추상화 레벨이 너무 높아서 내가 할 게 별로 없고,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너무 오랜 시간을 바쳐야 하며, 매번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느낌이 들어 급속도로 재미가 없어졌다. 터닝 포인트가 되었던 것은 그해 여름, 42 공통 과정에 있던 팀 프로젝트들을 수행하면서 열심히 하는 팀원들을 보며 많은 영감을 얻었다. C++로 IRC 서버 짜는 과제와 JS로 풀스택 웹앱 짜는 과제(트센)를 했었는데, 아직까지도 내게 팀플 희망 편
으로 기억될 정도로 모두가 열정적으로 참여했었다.
특히 트센을 진짜 열심히 했었다. 트센할 때는 모르는 것투성이였고, 학교 밖에서 처음 제대로 하는 팀 프로젝트라는 약간의 압박도 있었고, 그 당시 내가 접할 수 있는 실무와 가장 가까운 활동이었다. 학교와 병행하면서 한 게 팀원들에게 아주 미안한 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자는 시간 빼고 내 뇌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계속 트센 생각을 하면서 지냈던 것 같다. 왕복 4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면서, 학교 빼고도 클러스터에서 160시간 동안 있었으니, 물리적으로 몰입한 건 확실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쉬운 지점도 많지만, 처음 치곤 굉장히 잘했다고 생각한다. 이유 없이 적은 코드도 거의 없는 것 같고, 페어 프로그래밍 등 다양한 기법으로 작업했었다. 이미 작성된 부분도 더 나은 방향이 없을까 함께 고민해 보고, 버그를 고치려고 다 같이 달려들어서 이것저것 까보는 재미도 있었다. 이 와중에 더 활동반경을 넓혀 여러 가지 지원해 보는 동료들을 보면서, 나도 본받으려고 노력했다. 글또도 이쯤 참여하게 되었다. 여러 대외 활동과 공채를 지원해 보면서, 생각보다 더 차가운 시장의 현실을 마주했던 것 같다.
운좋게 기술 면접을 보게 된 이야기
열심히 1년을 불태우고 나니, 재조차도 남지 않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 23년으로 돌아가라면 못 할 것 같다. 그 정도로 열심히 했던 것 같은데, 뭐가 바뀌었는지 잘 체감되는 게 없었다. 솔직히 인턴이라도 하나 해볼 수 있을 줄 알았다. (ㅋㅋ)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고, 길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관성으로 코딩 테스트 준비를 하면서, 그간 궁금했던 파이썬의 low-level 구현을 조금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록의 양과 질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기분이 들었던 게 기록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쯤 쓴 글이 아직도 블로그 조회수 상위에 랭크되어 있다. 처음 큐레이션이 되었던 것도 이때쯤 썼던 글이다. 그렇게 4학년 1학기를 시작하게 되었고, 가만히 있기 불안했던 나는 새로 시작된 공채 시즌을 맞이하며 쓸만한 건 다 써보기 시작했다. 코테 경험이 확 늘어서 좋았고, 자소서도 적어버릇하니까 뭔가 점점 나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실상은 AI 활용력이 더 많이 늘었다) 바쁘게 지냈다. 정말 정말 운 좋게도, 내가 가고 싶었던 기업의 기술 면접을 보게 되었다. 대입 때도 면접을 본 적이 없어서 이게 인생 첫 면접이었다. 같이 붙었던 친구와 함께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부끄럽게도 이때 처음 접한 CS 지식이 생각보다 많았다. 정말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싶었지만, 뭐가 나올지 잘 모르니까 닥치는 대로 준비했다. 물론 이 준비했던 내용들이 쓰일 일은 없었다. 따로 후기를 적고 싶어서 말을 아껴야겠다. 하여튼 같이 준비했던 친구와 현타가 심하게 와서 잠깐 여행도 다녀오고 그랬다. 여행 갔다 오니까 두 번째 기술 면접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것도 따로 후기로 적어야겠다.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운 좋게 두 번의 기술 면접을 보고 나니, 그간 완전히 잘못 학습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식을 머리에 넣는 것은 어느 정도 잘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체화하고 자연스럽게 녹여내어 다른 방향으로 확장하는 것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혀 구조화가 되지 않고, 기술을 사용하면서 근거와 원리는 배제하고 겉핥기식으로 사용 그 자체에만 집중해 왔었다. 이걸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여러 대외 활동에 지원해 보았다.
부스트캠프 입과
더 가고 싶은 곳이 있었지만, 네이버 부스트캠프에 붙게 되었고 솔직히 할지 말지 고민을 좀 길게 했다. 결국 이게 아니면 할 게 없다는 근거로 시작했는데, 여기서 내 갈증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영어 단어를 공부할 때 예문과 발음을 같이 공부해야 하는 것처럼, 기술을 공부할 때도 사용법뿐만 아니라 그 등장 배경과 원리, 해결하는 문제에 대해 같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공부해 보니까 나도 세상에 존재하는 문제를 멋있게 풀어내 보고 싶어졌다. 참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직업이지만, 인제야 확신이 생긴 것 같다.
부스트캠프에 입과 하고 다양한 활동을 하며 매일매일 ‘이러면 되지 않을까?’ →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이게 맞나?’ → ‘이 정도면 훌륭하지’ → (무수한 허점 발견)을 반복했다. 코딩과 학습 측면에서의 사고 과정은 이랬고, 매일/매주 랜덤한 동료들과 서로 리뷰하고 사고 과정을 점검하고 생각을 공유하는 등 활동을 하다 보니, 내 시야도 넓어지고 소프트 스킬도 향상되는 경험을 했다. 어떻게 해야 내 피드백이 상대의 기분을 해치지 않고 (덜 해치고) 내 핵심을 잘 전달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상대의 피드백을 듣고 상대방이 ‘이 사람은 내 피드백을 경청하는구나’ 느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상대의 피드백을 효과적으로 나에게 녹일 수 있을지 많이 고민해 보고 개선해 나가려고 노력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입과한게 정말 다행이었다. 이런 경험을 할 수 없었다면, 난 올해 초의 실패에서 무엇이 잘못되었었는지 깨닫지 못한 채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이후의 이야기는 올해 말 24년 회고에서 적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올해 마무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여기서 끊는 게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24년은 해피엔딩이길 바란다. 2년 동안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눈에 띄는 성과가 생겼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최근 부스트캠프 멤버십 과정을 진행하면서 함께 학습했던 동료들에게 익명 피드백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몇 개 가져와 보면 (공개하면 안 될 것 같은 일부 단어들을 마스킹하고, 그 외는 그대로 가져왔다.)
- 항상 뭐를 준비하셨고 어떻게 진행하셨는지 조곤조곤 설명해주셨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딱 정리되어 말씀해주시는거 같아 가장 듣기 편했던거 같습니다. 데일리 레코드를 통해 매번 고민을 기록하시고 개선해나가시는 모습이 되게 보기 좋았습니다. 커밋도 세분화하여 찍으시는걸 보며 어떤걸 진행하셨는지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 코드리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고, 질문을 남겨 주셔서 남긴 질문의 답변을 보고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 코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문제점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즉시 반영하는 등 다른 사람의 피드백을 적재 적소에 적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일일 기록을 다 읽고나면 현준님이 겪으신 고민과정을 함께 거쳐가는 기분이 들어 좋았습니다. 비슷한 문제점에 대해 어떤 선택지를 찾아 무엇을 고르는지를 보고, 이후 그룹 리뷰 시간에서 이를 설명주실 때에도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제 의견을 내는 것 역시 수월했던 것 같습니다.
- 질문에 대해 적극적으로 링크 공유를 해주시면서 구체적으로 답변해주시는게 정말 좋았습니다. 그래서 참고자료에 넣기도 쉬웠고 학습정리에 도움이 됐습니다.
- 본인이 겪었던 시행착오들과 정리해둔 내용을 잘 공유해주셔서 지식적으로도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또, 제가 PR 리뷰에 대한 피드백을 그룹 리뷰 시간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다시 언급하고 싶습니다. 예전에 분량을 채우기 위해서 의무적으로 리뷰하는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 생각이 듭니다. 짧은 피드백도 충분히 의견을 전달할 수 있고 상대방의 생각을 갇히게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괜찮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때, 제 말을 잘 들어주시고 수용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고 생각해보겠다고 하셨습니다. 의견을 적용하던 하지 않던 일단 들어주고 생각해본다는 자세가 저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 Github PR에서 적극적으로 리뷰 달아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이번주에 프로젝트 구현하는 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다른 분들에게도 성심성의껏 달아주시는 모습을 보고 저희 조에서 리뷰를 많이 작성하게 된 것 같습니다. 스크럼 때 노션 페이지에 재밌게 할 수 있었던 것도 현준님 덕분인 것 같아요!
- 3주차 데일리 스크럼과 그룹 리뷰 시간에 적극적으로 서버 관련 코드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주실 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때 당시에 서버 코드가 작성된 상태가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그 때의 PR들을 참고하면서 구현했던 기억이 있네요! 의미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 여러 쿼리를 병렬로 처리할 때와 하나의 긴 쿼리를 단일로 처리할 때의 차이점을 언급해주셔서 데이터베이스 커넥션에 대해 깊은 학습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 최근에, 배포를 하셨던 때가 기억납니다. 저는 일단 배포하자! 라는 생각을 전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준님께서 미션에 배포가 있으니, 일단 배포해보는 경험을 하자! 라고 생각해서 배포를 하셨다고 해주셨습니다. 물론,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여러 경험을 해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시도하지는 못했었습니다. 현준님 덕분에 저도 시도해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일일회고를 작성하시고 PR에 공유하셔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구현을 하셨는지와 성능 개선 과정 등을 알 수 있어서 좋았고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PR 리뷰도 자세하게 이런 부분은 이렇게 해도 좋을 것 같다 이야기해주셔서 다른 방법에 대해 알게되는 계기도 되고 제 코드 품질을 더 높일 수 있었습니다. 또 성능 개선하신 부분을 자세하게 작성하셔서 공유해주신 것이 인상에 남았습니다. 보고 저도 현준님처럼 성능 개선 해보고 싶다는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생각을 가지게 해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말 다양한 피드백을 받았었구나…. 좋은 말씀 해주신 분들께 감사하다. 부스트캠프를 하면서 다짐했던 부분이 바로 코드 작성 근거를 확실히 하기 위해 일지를 작성해 보자는 거였는데,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던 것 같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나도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다는 점이 뿌듯하기도 하다. 피드백을 GPT에 넣고,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 설명해달라고 요청해 보았다.
받은 피드백을 토대로 다른 사람들이 바라본 당신의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 꼼꼼하고 준비된 사람: 모든 작업에 대해 철저하게 준비하고 체계적으로 접근하여 복잡한 과정을 명확하고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화된 접근 방식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설명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며, 큰 도움이 됩니다.
- 성찰하고 성장하는 학습자: 매일 성찰하고 진행 상황을 기록하는 습관은 성장을 향한 헌신을 보여줍니다. 이는 본인의 업무뿐만 아니라, 문제 해결 과정을 동료들이 함께 배울 수 있게 하여 공동의 학습 효과를 제공합니다.
- 지식 공유와 멘토링에 적극적인 사람: 코드 리뷰와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건설적인 피드백을 제공하고 유용한 자료를 공유함으로써 협력적인 학습 환경을 조성합니다. 자신의 성공과 도전 경험을 솔직하게 공유해 동료들이 배울 수 있도록 돕습니다.
- 피드백을 수용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의 피드백을 수용하고 신중하게 고려하여 적절히 적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한 개방적인 태도는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존중하고 자기개발에 노력하는 모습으로, 많은 이들에게 긍정적으로 인식됩니다.
- 실험을 장려하는 사람: 배포와 같은 새로운 영역에 대해 ‘먼저 시도해보자’는 태도로 동료들에게 동기부여를 합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경험을 시도하고 실무 지식과 기술을 넓힐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 코드 품질과 성능 향상에 집중하는 사람: 성능 최적화와 코드 품질을 중시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높은 기준을 유지하도록 영감을 줍니다. 자세한 성능 개선 노트와 건설적인 PR 리뷰는 계속해서 개선하려는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론적으로, 동료들은 당신을 신뢰할 수 있고, 체계적이며 협력적인 팀원으로 인식하며, 지속적인 학습과 상호 성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기술적 강점뿐만 아니라 뛰어난 대인관계를 통해 신뢰와 존중, 그리고 학습이 함께 이루어지는 환경을 조성하는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뭔가 너무 고평가해 주는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하다. 말을 멋들어지게 꾸며주는 건 GPT가 짱인 듯하다.
팀에서 어떤 포지션이 어울리는가?
학교 팀 프로젝트에서 팀 리더 자리에도 있어 보고, 대외 활동 프로젝트 들에서 평범한 구성원의 위치에도 있어 봤지만, 내 생각에 나는 서포팅하는 위치에 있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의사 결정에 비용을 많이 들이는 편이라, 리더의 위치에 있으면 팀원들이 많이 답답해할 것 같다. 좋게 말하면 신중한 거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선 그저 우유부단한 사람으로 비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내적 기준이 남들보다 높은 편이라, 내 기준대로 프로젝트를 이끌어보면 지치는 팀원들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 (결국 마지막쯤 가서 타협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름 꼼꼼한 편이긴 한데, 이건 리더의 위치에 있어도 좋은 점이지만, 팔로워의 위치에 있을 때도 발현될 수 있는 장점이다. 책임을 덜 질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 아이디어 방출이 잘 되는 것 같다. 생각을 가볍게 던져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편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 사고 흐름이 정지되는 경우가 많다.
좋은 개발자란 뭐라고 생각할까?
예전엔 그저 코드 잘 짜는 사람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계속해서 공부를 해보다 보니, 현시대의 소프트웨어는 한두 명으로 구현되고 유지될 수 있는 복잡도가 아니며, 그러므로 더욱이 소통이 중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나에게 소통을 잘한다
의 기준은, 명확하게 본인의 상황을 표명할 수 있으며 본인의 생각을 부드럽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떤 상황에 부닥쳐있는지 인지하고 공유할 수 있다면 이미 나와 같은 문제를 겪었던 동료의 도움을 받거나 동료가 이를 인지하고 본인의 태스크를 조정할 수 있다. 본인의 생각을 부드럽게 전달할 수 있다면, 상대를 존중할 수 있으며 여러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만 잘하면 안 되겠지…? 직무 능력은 기본일 거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꾸준한 공부와 기술에 관한 관심은 필수인 듯하다.
무엇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는가?
항상 나의 행복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무엇이 나를 행복으로 이끄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야 나도 안정감 +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특히 남들 돕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내가 신경 써줘서 도움 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정말 기분이 좋다. 혼자 행복해선 큰 의미가 없다. 챙기지 못한 사람들이 생각나 이내 불안해지곤 한다. 내가 좀 더 힘쓰더라도 주변이 같이 행복해야 비로소 안심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남들의 행복이 제 행복이에요.
라고 하기엔 좀 가식적이지 않나 생각이 든다. 사람이라면 무릇 본인의 욕구를 먼저 채우게 되어있으니까. 그래서 난 같이 가기
에 초점을 둔다. 그렇다고 떠먹여 주는 짓은 잘 하지 않는다. 물고기를 다 잡아다가 상을 차려주면, 그건 남이 물고기 잡는 방법을 학습할 기회를 빼앗고, 나에 대한 의존성을 늘려 장기적으로 상대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같이 가기
란, 생선을 먹고 싶은 사람에게 낚싯대와 미끼 구매처 정도를 알려주고, 같이 낚시하러 떠날 기회를 얻는 것에 가깝다.
마치며
생각을 정리할 일이 생기거나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질문이 생기면 이 글을 지속적으로 수정해 보려고 한다. 나를 되돌아보는 과정에 선뜻 손이 가진 않지만, 더 미루면 앞으로도 안 할 것 같은 생각에 기회가 있을 때 쭉 적어보았고,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괜스레 뿌듯해지면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답다’라는 말에 대한 고민이란 글을 읽어보고, ‘나’다워 지기 위해 사유하는 과정을 늘려보려고 노력했지만, 최근엔 바쁘다는 핑계로 일기도 잘 쓰지 않았다. 지금 시점에서 다시 쓴 삶의 지도 확장판으로, 자기다운 것이 무엇인지 생각의 물꼬를 틀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서 좋다. 아마도 다음 글은 채용 전형 후기가 될 것 같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도전했던 그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두고 휘발되기 전에 얼른 글로 옮겨보고 싶다. 생각 이상으로 분량이 길어지게 되었는데, 적다 보니까 자꾸 살을 붙이고 싶어져서 그렇다. 여기까지 온 나에게 박수 치고 격려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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